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랭크 토머스 (문단 편집) == 선수 시절 == 다른 미국의 운동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프랭크 토머스 역시 고등학교 시절 야구와 농구, 미식축구를 병행했다. 그러나 그 중 야구를 가장 좋아했던 토머스는 1986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드래프트|드래프트]]에서 자신을 지명해주는 팀과 무조건 계약하겠다고 결심했지만, 196cm, 125kg라는 야구 선수보다 미식축구 선수에 어울리는 피지컬을 가진 토머스를 지명하는 팀은 없었다. 결국 미식축구로 유명한 [[어번 대학교]]에 미식축구 선수 장학금을 받고 진학한 토머스는 미식축구 팀의 [[타이트엔드]]를 맡았지만, 정작 토머스는 본업인 미식축구를 내팽겨치고 야구에만 집중했다. 이에 학교는 토머스의 장학금을 취소했으나 동시에 야구 팀 최고의 스타를 잃고 싶지 않았기에, 특별 기금을 조성해 토머스에게 새로운 장학금을 주었다. 그리고 1989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전체 7순위로 [[시카고 화이트삭스]]에 지명받게 된다. [[마이너 리그]]를 빠르게 졸업하고, 1990년 [[메이저 리그]]에 콜업된 토머스는 60경기에 출장해 .330 .454 .529 7홈런 31타점을 기록하면서 빠르게 메이저 리그에 정착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토마스 첫 8년 성적.jpg|width=100%]]}}} || ||'''토마스의 첫 8년은 그토록 많은 찬양을 받는 [[마이크 트라웃]]의 첫 8년을 타격 한정으로는 모든 면에서 우위를 점한다.'''[* 물론 시대가 다르다는 점, 트라웃은 수준급 중견 수비를 보여줬고 스피드 툴도 갖췄다는 점, 토머스는 만 21세 데뷔지만 트라웃은 19세 데뷔라는 점 등을 고려해야 한다.]|| 이듬 해인 1991년 첫 풀타임 시즌을 맞이한 토머스는 158경기에 출장해 .318 .453 .553 32홈런 109타점이라는 신인답지 않은 성적을 올리면서 그 해 아메리칸 리그 MVP 투표 3위에 올랐다.[* 1991년 아메리칸 리그 MVP 수상자는 [[칼 립켄 주니어]]였고 ,2위는 [[세실 필더]]였다.] 이때부터 1997년까지 토머스는 메이저 리그 역사상 유일한 '''7년 연속 3할-20홈런-100득점-100타점-100볼넷'''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1992년 160경기 .323 .439 .536 24홈런 115타점으로 자신을 예열한 토머스는, 1993년 아메리칸 리그 MVP를 수상하게 된다. 이 해 토머스는 153경기에 출장해 '''.317 .426 .607 41홈런 128타점'''을 기록했다. 1993 ALCS에서, 처음으로 포스트 시즌에 진출한 토마스는 데뷔전인 1차전에서 5타석 1안타/4볼넷으로 5출루에 성공하는 등 총 27타석/17타수 10BB/5K 6안타 1홈런 3타점 2득점 .353/.593/.529 1.122OPS로 활약하며 단일 챔피언십 시리즈 최다 볼넷 기록을 세웠지만 팀은 탈락. 이듬 해인 1994년은 [[1994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파업 사태|파업]]으로 인해 어수선했던 시즌이었지만 토머스는 113경기에 출장해 '''.353 .487 .729 38홈런 101타점'''을 기록해 아메리칸 리그에서 [[로저 매리스]] 이후 처음으로 MVP 2연패에 성공했다. 이때 wRC+ 205를 기록했는데 [[배리 본즈]]와 [[마크 맥과이어]]를 제외하면 2020년 현재까지 마지막으로 단일시즌 wRC+ 200을 넘겼다. 같은 해 내셔널 리그 MVP [[제프 배그웰]]도 똑같이 wRC+ 205를 기록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생년월일도 같다. 이 시즌의 MVP 수상을 106경기만 출전하고도 .357 .438 .714 36홈런 101타점을 기록한 [[알버트 벨]]에 대한 기자들의 안 좋은 인식 덕으로 보는 의견이 있다. 하지만 이는 기자단과 일반인의 지식 차이를 무시한 서술이다. 당시 토머스는 타율에서 [[폴 오닐]]을 6리, 홈런에서 [[켄 그리피 주니어]]를 2개, 타점에서 [[커비 퍼켓]]을 11개 차로 뒤쫓고 있어 1967년 [[칼 야스트렘스키]] 이후 첫 번째 [[트리플 크라운/야구#s-1.2|트리플 크라운]]에 도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 트리플 크라운은 놓쳤지만, 1957년 윌리엄스(.528) 이후 이후 가장 높은 출루율(.487)과 1957년 윌리엄스(.731) 이후 가장 높은 장타율(.729)을 기록했다. 20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토머스보다 더 높은 출루율을 기록한 아메리칸 리그의 타자는 없고 내셔널 리그에서도 4연속 MVP 시절의 본즈를 제외하면 없다. .487의 출루율은 역대 1루수 단일 시즌 최고 기록이다. 장타율 역시 1996년 마크 맥과이어만이 더 높은 수치(.730)를 기록했다. 또 토머스는 112볼넷/54삼진를 기록했는데, 토머스 이후 100개 이상의 볼넷과 2대1의 볼넷/삼진 비율을 동시에 기록한 선수는 '''[[배리 본즈/선수 경력#s-3.1|배리본즈]](4회)'''뿐이다. 즉 경기 수가 적은데 홈런과 타점 수치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토머스가 MVP를 수상한 게 벨과 기자들의 안 좋은 관계 덕분이라고 보는 것을 합리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1994년 토머스는 몇십 년 만에 한 번 나오는 기록들을 달성하고, 또 달성하려는 중이었기 때문. 파업의 여파가 이어졌던 1995년에도 145경기 .308 .454 .606 40홈런 111타점을 기록하고, 1996년에도 141경기 .349 .459 .626 40홈런 134타점을 기록하며 건재함을 보여줬던 토머스였지만 어느새 암운이 몰려오게 되는데 바로 알버트 벨의 영입이었다. 1997년 알버트 벨이 5년 $55M의 사상 최고 계약으로 시카고 화이트삭스에 입단하면서 하루아침에 2인자가 되어버렸고, 연봉에서도 큰 격차를 느낀 토머스는 팀에 섭섭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 해 벨은 자신의 명성에 맞지 않게 조금 부진한 모습이었지만, 토머스는 146경기 .347 .456 .611 35홈런 125타점으로 타격왕과 함께 타율-출루율-OPS에서 리그 1위를 석권하면서 아메리칸 리그 MVP 투표 3위에 올랐다.[* 1997년 아메리칸 리그 MVP 수상자는 켄 그리피 주니어였고, 2위는 티노 마르티네즈였다.] 1998년을 앞두고 7년 $64.4M의 벨의 계약에 버금갈 만한 재계약을 맺은 토머스였지만, 스프링 캠프를 앞두고 체중이 크게 불어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 해 토머스가 160경기 .265 .381 .480 29홈런 109타점으로 크게 부진한 반면에 알버트 벨은 자신의 명성에 걸맞는 성적을 냈고, 시즌이 끝나자 마자 자신의 계약에 삽입되었던 엘리베이터 조항을 발동해 FA가 되어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이적했다.[*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계약을 맺으면서 벨이 얻은 엘리베이터 조항은 다른 선수들의 연봉이 벨의 연봉액을 초과하는 경우 항상 연봉 랭킹에 들어가도록 차액을 추가로 지급하지 않으면 FA가 되어 자유롭게 타 팀과 계약할 수 있는 극단적인 꿀 보장이었다. 설마 화이트삭스도 5년 내에 더 큰 계약이 나타날까 했지만 당시 메이저 리그의 연봉 폭증과 함께 [[보스턴 레드삭스]]가 [[페드로 마르티네즈]]와 6년 $75M 재계약을 맺으면서 현실이 되어버렸다.] 1999년 토머스는 자신의 타석 위치를 뒤로 옮기는 조정을 했지만, 오히려 전년보다 부진한 135경기 .305 .414 .471 15홈런 77타점에 그치면서 끝물에 접어드는 듯 했다. 하지만 2000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서 건너 온 [[폴 코너코]]의 합류로 지명타자로 자리를 옮겼고, 절치부심해 살을 뺀 토머스는 159경기 .328 .436 .625 43홈런 143타점을 기록하면서 아메리칸 리그 MVP 투표 2위에 올랐고[* 2000년 아메리칸 리그 MVP는 [[제이슨 지암비]]였고, 3위는 [[알렉스 로드리게스]]였다.] 올해의 재기 선수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2001년 토머스는 대형사고를 치고 만다. 당시 메이저 리그에는 [[알렉스 로드리게스]]와 [[텍사스 레인저스]]가 맺은 10년 $252M 계약과 [[데릭 지터]]와 [[뉴욕 양키스]] 간의 10년 $189M 재계약 등의 초대형 계약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는데, 자신의 계약이 이들에 비해 초라함을 불평하던 토머스는 스프링 캠프에서 무단이탈해버리고 만다. 결국 토머스는 계약 규모를 늘리는 대신 일정 수준 이상의 성적이 나오지 않으면 계약 재조정을 받아들이겠다는 기량 감퇴 조항(diminished skills)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는 완벽한 오판이었다. 이 과정에서 토머스는 돈을 밝힌다는 좋지 않은 이미지를 얻게 됐으며, 선수단 내에서의 영향력을 일순간에 잃어버렸다. 거기에 그 난리를 피워 팀 분위기를 망쳐놓았더니, 정작 시즌이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부상으로 시즌 아웃되며 큰 비판을 받았다. 2001년과 2002년 동안 부상과 부진으로 인해 20경기 .221 .316 .441 4홈런 10타점과 148경기 .252 .361 .472 28홈런 92타점에 그친 토머스는, 2003년 [[로저 클레멘스]]에게 만루홈런을 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153경기 .267 .390 .562 42홈런 105타점을 기록했지만, 2004년과 2005년도 74경기 .271 .434 .563 18홈런 49타점과 34경기 .219 .315 .590 12홈런 26타점을 기록하며 앞서와 다른 것 없이 크게 부진했고, 결국 계륵이 되버린 토머스는 팀이 [[야구계의 저주들|블랙삭스의 저주]]를 깨며 우승한 순간에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팀은 내친 김에 토머스에게 은퇴를 종용하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그동안 이기적이고 미운 짓만 골라 했어도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과거 엄청난 활약을 한 대선수가 그런 지경까지 몰리자 팬들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결국 화이트삭스를 떠난 토머스는 2006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 최저 연봉인 $0.5M에 계약하게 되는데, 이게 웬걸 137경기에서 .270 .381 .545 39홈런 114타점을 기록하면서 다시 한 번 올해의 재기 선수상을 수상했고[* 이 상을 아메리칸 리그에서 두 번 받은 건 토머스가 유일하며, 내셔널 리그에서는 [[크리스 카펜터]]가 두 번 받았다.] [[클래스는 영원하다]]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여기에 미네소타 트윈스와의 디비전 시리즈 1차전에서 그 시즌 사이영 상 수상자인 [[요한 산타나]]와 제시 크레인을 상대로 2홈런을 치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듬 해인 2007년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계약에 성공한 토머스는 155경기 .277 .377 .480 26홈런 95타점을 기록하면서 전년도의 기세를 제법 이어갔지만, 2008년에는 부상과 부진을 거듭해 팀에서 방출된 뒤 다시 오클랜드로 돌아갔지만 40경기 .240 .349 .374 8홈런 30타점을 기록하는 데 그쳤고, 이후 1년간 팀을 찾지 못하며 결국 2010년 2월 은퇴를 선언하고 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